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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무엇이 낙엽을 무르익게 하는가

 오늘 내 인생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사실 마지막 예비군에 대한 소회로도 글을 한 바닥을 써 내려갈 수 있을 지경이지만, 오늘은 나를 휘감은 이 흐릿한 우울감에 대한 일기를 써볼까 한다.

 

 최근 우울한 일이 있었다. 학업적으로 우울한 일이거나 경제적으로 우울한 일이라면야 워낙 달관한 지경에 이르렀기에 그다지 타격이 없겠지만, 공교롭게도 요즘의 우울함은 사람 때문에 피어난 우울감이다.

 

 내가 사람 때문에 우울하다니! 정말이지 내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근 몇 년간 나는 가족 이외 다른 사람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정도로 고립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히려 그런 사람 때문에 상처 입거나 괴로워할 일이 없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나의 빈약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사족은 그만 접어두고, 그나마 예비군 훈련이 있는 날 이런 우울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학업에 몰두해야 할 날이었다면 흩어지는 집중력을 부여잡고 절절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 인생 마지막 예비군 훈련에만 집중하다 보니, 그래도 발뒤꿈치를 계속해서 깨물던 우울감을 어느 정도 달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유로 애매하게 조기퇴소를 하게 되면서 홀로 훈련장을 빠져나오다 보니, 그 틈을 타 다시 한번 그놈의 우울감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애써 억지로 억눌렀어야 했는데 고개를 쳐드는 우울감과 그만 눈이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오기 시작했고, 깊은 구멍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바닥만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 나도 모르게 질끈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 오는 풍경이라도 갈아치워 내게 엉겨붙는 우울감을 떨쳐낼 심산이었다. 그런 맘에 별 기대 없이 시선을 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훈련장을 둘러싼 울긋불긋한 가을 숲이 더없이 울창하도록 나를 안아 주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이렇게 물이 들었구나... 바람이 불 때마다 수천 장의 은행잎이 무더기로 나무 사이를 휘몰아쳤다. 공간과 시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 속의 경이로운 학회에 참석한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군무지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철새들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어쩌면 저런 나뭇잎 한 장 한 장 역시, 가을이면 따뜻한 흙 속으로 떠나갔다 봄이 되면 다시 새순으로 찾아온다는 점에서, 오고 가는 철새들과 그리 다르지 않겠거니란 생각도 들었다. 발치에서 칭얼거리던 우울함도 똑같이 시선을 빼앗겼는지 아무 말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문득 무엇이 낙엽을 저리도 무르익게 하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홍보실에서 촬영한 캠퍼스의 은행잎들. 훈련장 내부 사진은 보안에 저촉되리라 생각되어 이로 갈음한다.

 

 '어쩌면 가을 나뭇잎들은 세상 사람들이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게 그들의 우울함을 대신 받아먹고 있는지도 몰라...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산소를 내뿜는 것처럼, 사람들의 우울함을 빨아들이고 발갛게 노랗게 익어가는 건지도 모르지. 만약 가을 나뭇잎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넘쳐 나는 우울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욱 괴로워하고 못 견뎌 했을지도 모른다. 한창 여물어져 왔던 여름이 가물어져 가는 가을에 짓눌려 가면서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낙엽들이 내 우울함을 마음껏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하염없이 숨을 죽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저 한동안 넋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개운해지고 차분해지는 것이 아닌가. 곁에서 몸을 부풀던 우울함도 품에 안아들 수 있을 정도로 한껏 작고 얌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들이 대신 짊어져 준 내 우울함은 저 수천 장의 나뭇잎들 어딘가에 담겨 바스라지고 흩어지겠지. 그리고 흙으로 스며들어 다가올 계절에 새로운 잎을 틔우는 양분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품에 남은 작은 우울함 역시 어느 날이면 바래지고 삭아져 내 맘속에 스며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정신을 세우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안다. 틀림없이 명백하고, 분명하다고 할 수 있지. 예로부터 사람들이 자연에서 배워온 역사(歷史)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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